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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회: "계약의 조건"

 


4회: "계약의 조건"

아침 8시, 하린은 거울 앞에서 마지막 점검을 하고 있었다. 웨딩드레스 피팅이라는 말에 평소보다 더 신경 써서 차려입었다.

"이제 진짜구나..."

왼손의 반지가 아침 햇살에 반짝였다. 어제 도윤이 끼워준 반지는 생각보다 무거웠다. 무게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띵동]

[로비에 도착했습니다.]

예정보다 10분이나 일찍 온 메시지에 하린은 서둘러 가방을 들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휴대폰이 울렸다.

"언니! 오늘 검사 결과 나온대."

"하은아, 걱정 마. 언니가 퇴근하고 바로 갈게."

"응... 근데 언니, 요즘 회사는 어때?"

하린은 잠시 말을 멈췄다. 동생에게조차 거짓말을 해야 한다는 게 괴로웠다.

"좋아. 열심히 하고 있어."

"다행이다... 언니가 힘들어하는 것 같아서 걱정했는데."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했다. 로비에는 이미 강도윤이 서있었다. 완벽한 수트 차림으로 휴대폰을 보고 있는 모습이 마치 화보 같았다.

"여보."

도윤의 부름에 하린은 놀라 휴대폰을 떨어뜨릴 뻔했다.

"하은아, 나중에 다시 전화할게."

"응? 언니 누구랑..."

전화를 서둘러 끊고 도윤에게 다가갔다. 로비에 있던 몇몇 주민들이 그들을 흘끔거렸다.

"늦지 않게 나왔네요."

"네..."

"이제 가죠."

주차장으로 향하는 동안 둘 사이에는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도윤은 조수석 문을 열어주었다.

"타세요."

"감사합니다..."

"아직도 존댓말이네요."

차 안에서 도윤이 피식 웃었다. 하린은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느꼈다.

"미안... 해요."

"지금처럼 어색하면 안 돼요. 오늘부터는 정말 약혼자처럼 보여야 해요."

차가 출발하고, 도윤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오늘 일정은 이렇습니다. 먼저 웨딩드레스 샵, 그 다음 주얼리 샵, 마지막으로 웨딩 스튜디오 미팅..."

하린은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마치 업무 보고를 듣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듣고 계신가요?"

"아... 네."

"긴장했나요?"

도윤의 물음에 하린은 고개를 저었다.

"그냥... 조금 어색해서요."

"어색한 건 이해합니다. 하지만 최선을 다해주세요. 이건 계약이니까요."

계약이라는 말에 하린의 가슴이 아려왔다.

차는 청담동의 고급 웨딩샵 앞에 도착했다. 입구에서 직원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강 부회장님, 서하린 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안으로 들어서자 우아한 웨딩드레스들이 즐비했다. 하린은 잠시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마음에 드시나요?"

"네... 너무 예뻐요."

"당신이 입으면 더 예쁠 거예요."

갑작스러운 칭찬에 하린은 놀라 도윤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여전히 차가웠다.

"연습하는 겁니다. 이런 말들에 익숙해져야 해요."

역시나... 하린은 쓴웃음을 지었다.

"먼저 이쪽 드레스들을 봐주시겠어요?"

직원의 안내를 받아 드레스를 고르는 동안, 도윤은 소파에 앉아 업무 메일을 확인하고 있었다.

"이 드레스는 어떠세요?"

하린이 고른 드레스는 심플하면서도 우아한 디자인이었다.

"가격을 신경 쓰지 마세요."

도윤이 고개도 들지 않고 말했다. 하린은 입술을 깨물었다.

피팅룸에서 드레스를 입어보는 동안, 하린은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순백의 드레스를 입은 모습이 낯설었다.

"나와보세요."

도윤의 목소리에 하린은 깊은 숨을 들이쉬었다. 커튼을 열고 나오자 도윤이 처음으로 휴대폰에서 시선을 떼었다.

순간 그의 눈빛이 흔들리는 것 같았다.

"어... 어떠세요?"

하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예쁘네요."

짧은 대답이었지만, 도윤의 목소리가 평소와는 달랐다.

"이 드레스로 하죠."

도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다른 것도..."

"시간이 없어요. 다음 일정이 있으니까."

차가운 목소리가 돌아왔다. 하린은 고개를 숙였다.

드레스를 갈아입고 나오자 도윤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주얼리 샵으로 가요."

차에 타자마자 도윤의 휴대폰이 울렸다.

"네, 회장님."

아버지와의 통화인 듯했다. 하린은 조용히 창밖을 바라보았다.

"네, 오늘 드레스 피팅 중입니다... 네, 다음 주 토요일 약혼식... 알겠습니다."

통화가 끝나고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회장님께는... 계약 결혼이라고 말씀드리지 않은 건가요?"

하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당연하죠. 아무도 알면 안 됩니다."

"혹시... 왜 저와의 계약 결혼을 선택하신 건지 물어봐도 될까요?"

도윤은 잠시 침묵했다.

"궁금해하지 마세요. 당신이 알 필요 없는 일입니다."

차가운 대답에 하린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주얼리 샵에 도착하자 또다시 VIP 대우가 이어졌다.

"이쪽으로 오시죠."

진열대에는 눈부신 다이아몬드 반지들이 가득했다.

"마음에 드는 걸 고르세요."

하린은 망설였다.

"저기... 너무 비싸 보이는데..."

"계약의 일부예요. 걱정하지 마세요."

도윤의 말에 하린은 조심스럽게 반지들을 살펴보았다. 그때 한 반지가 눈에 들어왔다.

"이건..."

심플한 디자인의 반지였다. 10년 전, 도윤과 함께 우연히 들른 주얼리 샵에서 본 것과 비슷했다.

[나중에 나한테 이런 반지 해줘요, 선배.]

[그래, 약속할게.]

"이 반지로 하시겠습니까?"

직원의 목소리에 하린은 정신을 차렸다.

"아... 아니요. 다른 걸로..."

하지만 도윤이 먼저 말했다.

"그 반지로 하죠."

하린은 놀라 도윤을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은 여전히 읽을 수 없었다.

"사이즈 조절은 필요 없을 것 같네요. 지금 바로 가져가겠습니다."

도윤이 카드를 꺼냈다. 하린은 가격표를 보고 숨을 들이켰다.

차로 돌아오는 길, 도윤이 작은 상자를 건넸다.

"이제 이걸로 바꿔끼세요."

하린은 어제 받은 임시 반지를 벗으려 했다. 하지만 손가락이 떨려 쉽게 빠지지 않았다.

"제가 할게요."

도윤이 갑자기 하린의 손을 잡았다. 차가운 손길에 하린은 심장이 멈추는 것 같았다.

도윤은 능숙하게 반지를 바꿔 끼웠다. 순간 그들의 눈이 마주쳤다.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이제 가죠. 스튜디오 미팅 시간이 됐네요."

도윤이 먼저 시선을 돌렸다. 하린은 가슴이 아려오는 것을 느꼈다.

스튜디오에서는 웨딩 촬영 콘셉트를 정하는 미팅이 있었다.

"자연스러운 커플 촬영을 위해서는 좀 더 친밀해 보여야 할 것 같은데요."

포토그래퍼의 말에 도윤이 대답했다.

"걱정 마세요. 촬영 전까지 연습하겠습니다."

그의 말에 하린은 쓴웃음을 지었다. 연습... 모든 게 연습이고 연기일 뿐이었다.

미팅이 끝나고 점심시간이 되었다.

"식사하고 가죠."

도윤이 근처 레스토랑으로 안내했다.

"저기..."

"네?"

"제가 점심에 약속이 있어서요..."

세리와의 약속이 생각났다.

"취소하세요. 이제부터는 저와의 일정이 우선입니다."

도윤의 말에 하린은 입술을 깨물었다.

레스토랑에 들어서자 직원이 VIP룸으로 안내했다.

"주문하세요."

"저는 샐러드로 충분해요."

"제대로 드세요. 오후에도 일정이 많아요."

도윤의 말에 하린은 조용히 메뉴를 넘겼다.

"그리고... 오늘 계약서를 써야 할 것 같네요."

도윤이 서류 봉투를 꺼냈다.

"지금요...?"

"네. 어차피 써야 할 거니까요."

하린은 떨리는 손으로 계약서를 펼쳤다.

계약 기간: 1년

계약금: 2억 원 (즉시 지급)

위자료: 1억 원 (계약 종료 시)

조건:

완벽한 부부 연기

과거 관계 비밀 유지

계약 기간 중 감정 개입 금지

약혼 발표 후 회사 사직

계약 종료 후 완전한 관계 단절

"이 정도면 충분할 것 같네요."

도윤이 펜을 건넸다. 하린은 마지막 조항을 다시 읽었다.

'완전한 관계 단절'

가슴이 아팠다.

"서명하세요."

하린은 천천히 펜을 들었다. 이것으로 모든 게 결정되는 것이다.

펜이 종이에 닿는 순간, 휴대폰이 울렸다. 병원이었다.

"여보세요?"

"서하린 씨, 지금 바로 병원에 와주셨으면 합니다. 하은 양이..."

하린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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