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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회: "비밀스러운 계약"

 


5회: "비밀스러운 계약"

하린은 병원 복도를 달렸다. 뒤에서 도윤의 발소리가 들렸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하은아!"

중환자실 앞에서 의사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폐 상태가 갑자기 악화됐습니다. 더 이상 미룰 수가 없어요. 내일이라도 수술을 진행해야 합니다."

"내일요...?"

하린의 다리에서 힘이 빠졌다.

"하지만 금요일로 예정되어 있었는데..."

"더 기다릴 수 없습니다. 지금 상태로는..."

그때 도윤이 끼어들었다.

"수술비는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내일 바로 수술을 진행해주세요."

의사와 하린이 동시에 그를 바라보았다.

"당신은..."

"제 약혼녀의 동생입니다."

도윤이 차분하게 말했다. 하린은 놀라 그를 쳐다보았다.

"그렇다면... 바로 수술 준비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의사가 서둘러 자리를 떴다.

"왜..."

하린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계약의 일부라고 생각하세요. 당신이 계약을 제대로 이행하기 위해서는, 동생 문제가 해결되어야 하니까요."

비즈니스적인 말투였지만, 하린은 그의 눈빛에서 무언가 다른 것을 발견한 것 같았다.

"고마워요..."

처음으로 자연스럽게 반말이 나왔다.

"중환자실에 들어가보세요. 저는 수술 관련 절차를 확인하고 오겠습니다."

하린은 조용히 중환자실로 들어갔다. 산소 마스크를 쓴 하은이가 힘겹게 숨을 쉬고 있었다.

"하은아... 언니가 왔어."

하은이가 천천히 눈을 떴다.

"언니..."

희미한 목소리였다.

"걱정 마. 내일 수술하기로 했어. 이제 다 괜찮아질 거야."

"그런데... 어떻게...?"

하은이가 수술비를 걱정하는 듯했다.

"언니가 다 해결했어. 넌 건강해지는 것만 생각하면 돼."

하은이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미안해... 언니 때문에..."

"쉿, 그런 말 하지 마. 언니는 네가 건강해지는 게 가장 중요해."

그때 도윤이 조용히 중환자실로 들어왔다.

"누구..."

하은이가 의아한 눈으로 도윤을 바라보았다.

하린은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도윤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하린 씨의... 약혼자입니다."

하은이의 눈이 커졌다.

"언니... 약혼자...?"

"응... 나중에 자세히 설명해줄게."

하린이 서둘러 말했다.

"내일 아침 8시에 수술이 진행됩니다."

도윤이 차분하게 설명했다.

"모든 준비는 제가 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이제 푹 쉬세요."

하은이는 여전히 놀란 표정이었지만,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언니... 그동안 미안했어..."

하은이의 눈이 감기며 잠이 들었다.

병실을 나오자 도윤이 하린의 팔을 잡았다.

"이제 계약서에 서명해야 합니다."

차가운 목소리에 하린은 현실로 돌아왔다. 그래, 이건 모두 계약일 뿐이다.

병원 카페에서 하린은 떨리는 손으로 펜을 들었다. 계약서의 마지막 조항이 눈에 들어왔다.

'계약 종료 후 완전한 관계 단절'

펜이 종이 위를 움직였다. 서명이 끝나자 도윤이 계약서를 가방에 넣었다.

"이제 정식으로 계약이 성립됐습니다."

하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목에 무언가가 걸린 듯했다.

"내일 수술 때문에 회사는 제가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남은 일정도 모두 취소했습니다."

"감사합니다..."

다시 존댓말이 나왔다.

"그리고..."

도윤이 잠시 망설이다 말을 이었다.

"내일... 제가 수술실 앞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하린은 놀라 고개를 들었다.

"괜찮아요. 제가..."

"약혼자라면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누가 볼지 모르니까요."

역시 연기였다. 하린은 쓴웃음을 지었다.

"이제 들어가보세요. 저는 회사에 다녀오겠습니다."

도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하린이 그의 소매를 잡았다.

"저기..."

"네?"

"정말... 감사합니다."

진심을 담아 말했다.

도윤의 표정이 잠시 흔들렸다. 마치 10년 전 그날처럼...

[도윤 선배, 감사합니다. 늘 저를 챙겨주셔서...]

[바보야. 당연한 일인데...]

하지만 순간적인 동요였다. 그의 얼굴은 다시 차갑게 굳어졌다.

"계약의 일부일 뿐입니다. 감사할 필요 없어요."

도윤이 돌아서서 걸어갔다. 하린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변한 게 없네... 여전히 차갑고, 다가갈 수 없는 사람...'

병실로 돌아온 하린은 하은이의 곁을 지켰다. 창밖으로 해가 저물어갔다.

[띵동]

휴대폰 메시지가 왔다.

[내일 아침 7시에 데리러 가겠습니다. - 강도윤]

하린은 한숨을 쉬었다. 이제 정말 시작이구나...

밤이 깊어갈수록 하린의 마음도 복잡해졌다. 10년 전의 기억이 자꾸 떠올랐다.

도서관에서의 첫 만남.

우연히 같은 수업을 듣게 된 날.

비 오는 날 우산을 함께 쓰던 순간.

그리고... 마지막 이별.

[미안해요, 선배. 더 이상 만날 수 없을 것 같아요.]

[이유라도 말해줘, 하린아.]

[그냥... 이게 좋을 것 같아요.]

갑작스러운 부모님의 사고.

하은이의 병원비.

모든 걸 혼자 떠안아야 했던 그때...

하린은 창가에 기대어 섰다. 병원 창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낯설었다.

왼손의 반지가 달빛에 반짝였다.

'이제 와서 후회해도 소용없어...'

새벽이 되어서야 하린은 잠깐 눈을 붙였다.

그리고 어느새 아침이 밝았다.

6시 50분, 도윤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로비에 도착했습니다.]

하린은 하은이의 이마에 키스했다.

"금방 올게..."

로비에는 이미 도윤이 서있었다. 어제와 같은 완벽한 수트 차림이었다.

"준비됐나요?"

차가운 목소리였지만, 어딘가 부드러움이 묻어있는 것 같았다.

"네..."

차에 오르자 도윤이 말했다.

"수술은 4시간 정도 걸린다고 합니다."

하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목이 메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주차장에 도착하자 도윤이 하린의 손을 잡았다.

"긴장했나요?"

따뜻한 손길에 하린은 놀라 고개를 들었다.

"이제부터 병원 사람들이 볼 수 있어요. 자연스럽게 굴어야 합니다."

역시 연기였다. 하린은 쓴웃음을 지었다.

수술실 앞.

하은이가 들어가기 전, 하린이 동생의 손을 꼭 잡았다.

"언니가 기다리고 있을게."

"언니... 고마워..."

하은이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수술실 문이 닫히고, 하린의 다리에서 힘이 빠졌다.

그때 도윤이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괜찮아요. 제가 있잖아요."

하린은 그의 품에 기대어 눈물을 흘렸다.

연기일까, 진심일까...

이제는 그것조차 구분할 수 없었다.

시간이 천천히 흘렀다.

9시, 10시, 11시...

도윤은 계속 하린의 곁을 지켰다.

때로는 커피를 사왔고,

때로는 조용히 손을 잡아주었다.

마침내 수술실 문이 열렸다.

의사가 환한 표정으로 나왔다.

"수술은 성공적이었습니다. 이제 회복만 하면 됩니다."

하린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었다.

도윤이 그녀를 안아주었다.

"다 끝났어요... 이제 괜찮아요..."

그의 목소리가 떨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하린이 고개를 들었을 때,

도윤의 표정은 여전히 차가웠다.

"이제... 계약에 집중할 수 있겠죠?"

현실로 돌아온 것 같았다.

하린은 눈물을 닦았다.

"네... 약속대로 하겠습니다."

도윤이 시계를 보았다.

"오후에 회사 일정이 있습니다. 먼저 가보겠습니다."

하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오늘..."

"계약의 일부라고 했잖아요."

도윤이 차갑게 말했다.

하지만 돌아서는 순간,

그의 눈빛이 잠시 흔들리는 것을 하린은 놓치지 않았다.

'도윤 선배... 당신에게도 이건 정말 그저 계약일까요?'

창밖으로 봄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10년 전, 그와 이별하던 날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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