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린은 병원 복도를 빠르게 걸었다. 방금 입금된 계약금으로 수술 일정을 잡으러 가는 길이었다. 가슴 한켠이 무거웠지만, 하은이를 생각하면 후회할 시간조차 없었다.
"서하린 씨!"
원장실 앞에서 주치의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수술비는 준비되셨나요?"
"네, 방금 준비됐습니다."
"다행이네요. 그럼 바로 수술 일정을 잡도록 하죠."
의사의 설명이 이어졌다. 수술은 이번 주 금요일. 성공률은 80%. 회복 기간은 최소 3개월...
하린은 기계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들었다.
"언니..."
병실로 돌아오자 하은이가 힘없이 미소 지었다. 산소 마스크 때문에 말하기도 힘들어 보였다.
"걱정 마. 이제 수술 날짜 잡았어. 금요일에 하기로 했어."
"어떻게... 갑자기..."
"언니가 좋은 기회가 생겼거든. 더 이상 걱정하지 마."
하린은 동생의 창백한 손을 꼭 잡았다. 차가운 손이 안쓰러웠다.
[띵동]
휴대폰으로 메시지가 왔다.
[오늘 저녁 7시, 청담동 르블랑. 약혼식 관련 미팅입니다. - 강도윤]
하린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계약 결혼이라고 해도 그들은 이제 약혼 커플인 것이다.
"언니, 무슨 일 있어?"
"아니... 회사 일이야."
"JK그룹이라며? 대단하다..."
"응. 열심히 할게."
하은이의 순수한 눈빛을 보며 하린은 마음이 아팠다. 동생에게조차 진실을 말할 수 없다는 게 괴로웠다.
저녁 6시 50분, 하린은 르블랑 앞에 도착했다. 청담동의 최고급 프렌치 레스토랑이었다.
"서하린 님이십니까?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직원의 안내를 받아 들어간 프라이빗 룸에는 이미 강도윤이 와있었다. 완벽한 수트 차림으로 와인을 음미하고 있는 모습이 우아해 보였다.
"늦지 않게 오셨네요."
차가운 인사와 함께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앉으시죠. 주문은 제가 했습니다."
하린은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테이블 위에는 이미 코스 요리가 준비되고 있었다.
"내일부터 본격적인 스케줄이 시작됩니다."
도윤이 서류 봉투를 건넸다. 그 안에는 빽빽한 일정표가 들어있었다.
"약혼식은 다음 주 토요일입니다. 그전에 웨딩드레스 피팅, 스튜디오 촬영, 예물 선택 등을 마쳐야 합니다."
하린은 일정표를 훑어보다가 멈칫했다.
"이번 주 금요일은... 제가 개인적인 일정이 있습니다."
"취소하세요."
도윤의 단호한 목소리에 하린은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동생 수술이..."
"수술이요?"
순간 도윤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네... 이번 주 금요일이 수술 날짜라서..."
잠시 침묵이 흘렀다. 도윤은 와인잔을 돌리며 생각에 잠겼다.
"알겠습니다. 금요일 일정은 조정하도록 하죠."
예상치 못한 배려에 하린은 놀랐다.
"감사합니다..."
"단, 조건이 있습니다."
도윤이 차갑게 덧붙였다.
"수술이 끝나면 바로 저와 함께 약혼식 준비에 참여하셔야 합니다. 시간 낭비는 없어야 합니다."
"네, 알겠습니다."
하린은 고개를 숙였다. 그의 배려에도 차가움이 묻어있다는 걸 느꼈다.
"그리고 하나 더."
도윤이 와인잔을 내려놓았다.
"오늘부터 서로 반말을 쓰도록 하죠. 약혼 커플이니까요."
갑작스러운 제안에 하린은 당황했다. 10년 전처럼 반말을...
"아... 네..."
"그리고 이제부터는 '여보'라고 불러요. 누가 들을지 모르니까."
도윤의 말에 하린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여... 여보..."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자 도윤이 피식 웃었다.
"연기가 많이 필요해 보이네요."
그때 웨이터가 메인 디쉬를 가져왔다.
"트러플을 곁들인 안심 스테이크입니다."
하린은 음식에 집중하려 했지만, 도윤의 시선이 느껴졌다.
"맛있게 먹어요... 여보."
도윤의 말에 하린은 포크를 떨어뜨릴 뻔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어떤 감정도 없었다. 완벽한 연기였다.
"내일은 웨딩드레스 샵에 가야 해요. 아침 9시에 제가 데리러 갈게요."
"직접 오실 필요는..."
"약혼자가 데리러 오는 게 이상한가요?"
도윤의 말에 하린은 입을 다물었다. 그의 말이 맞았다. 이제 그들은 약혼 커플인 것이다.
"그리고..."
도윤이 작은 상자를 꺼냈다.
"이건 임시 반지예요. 내일 정식으로 예물을 고르겠지만, 그전까진 이걸 끼고 있어요."
상자 안에는 우아한 디자인의 다이아몬드 반지가 들어있었다. 하린은 떨리는 손으로 반지를 집어들었다.
"제가 끼워드릴게요."
도윤이 갑자기 손을 뻗어 하린의 왼손을 잡았다. 차가운 손길에 하린은 놀라 숨을 들이켰다.
"긴장하지 마세요. 자연스러워 보여야 해요."
도윤은 능숙하게 반지를 하린의 약지에 끼웠다. 순간 10년 전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도윤 선배, 나중에 나한테 반지 끼워주실 거예요?]
[그래. 네가 원하는 반지를 끼워줄게.]
[약속하는 거예요?]
[약속할게, 하린아.]
"왜 그렇게 보세요?"
도윤의 목소리에 하린은 정신을 차렸다.
"아... 아니에요."
"과거는 생각하지 마세요. 지금은 비즈니스일 뿐입니다."
차가운 말에 하린의 가슴이 아팠다.
식사가 끝나갈 무렵, 도윤이 마지막 이야기를 꺼냈다.
"내일부터는 회사에서도 조심해야 해요. 아직 공식 발표 전이니까."
"네..."
"그리고 한 가지 더. 약혼 발표 후에는 당신이 회사를 그만둬야 합니다."
"네? 하지만..."
"JK그룹의 며느리가 직원으로 일하는 건 적절하지 않아요."
도윤의 말에 하린은 말문이 막혔다.
"걱정 마세요. 계약 기간 동안 충분한 생활비를 보장할 테니까요."
비즈니스적인 말투가 가슴을 찔렀다.
"이제 가봐요. 내일 아침에 보죠... 여보."
마지막 말은 마치 연습하듯 덧붙여졌다.
하린은 레스토랑을 나와 차가운 밤공기를 마셨다. 왼손의 반지가 달빛에 반짝였다.
'이게 정말 내가 선택한 길이 맞나...'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세리였다.
"하린아! 어떻게 된 거야? 갑자기 연락도 안 되고..."
"세리야... 나 지금 너무 복잡해."
"무슨 일이야? 어디야? 내가 갈까?"
"아니... 집에 가는 중이야. 내일... 시간 되면 만날까?"
"당연하지! 내일 점심때 보자."
전화를 끊고 하린은 한숨을 쉬었다. 세리에게 이 모든 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집으로 돌아오는 길, 하린은 병원에 들렀다. 하은이는 이미 잠들어 있었다.
"금요일이면 다 나아질 거야..."
동생의 이마에 키스하며 속삭였다.
집에 도착해서야 하린은 오늘 하루를 되돌아볼 수 있었다.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낯설었다.
왼손의 반지가 눈에 들어왔다. 10년 전 꿈꾸던 것과는 너무나 다른 모습으로 받게 된 반지...
[띵동]
또 메시지가 왔다.
[내일 아침 8시 30분. 늦지 마세요. - 강도윤]
하린은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다.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도윤 선배... 아니, 이제는 그냥 강도윤 씨... 당신에게 이건 정말 그냥 비즈니스일까요?'
창밖으로 달빛이 스며들었다. 마치 10년 전, 그와의 마지막 밤처럼 쓸쓸한 달빛이었다.
내일부터 시작될 새로운 삶을 생각하니 가슴이 떨렸다. 이제 그녀는 강도윤의 약혼녀... 계약상의 약혼녀가 되는 것이다.
'이게 정말...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일까...'
하린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내일은 또 다른 시작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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